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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을 빌자 사랑이 왔다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 깊이 있는 감정을 끌어올리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탁동경은 20대의 나이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웹소설 편집자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른 이는 ‘멸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멸망과 마주하게 된 동경은 인생을 거는 계약을 제안받으며 운명적인 서사의 문을 엽니다.

이 드라마의 도입부는 극적인 사건보다도 서늘하고 고요한 분위기로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삶에 회의적인 동경과,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운명을 지닌 멸망. 이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며 예측 불가능한 서사를 전개해 나갑니다. 죽음을 앞둔 인간과 죽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맺는 유일무이한 감정선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판타지 장르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심에 있는 것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멸망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실제 인간처럼 형상화되면서, 드라마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삶의 유한함을 각인하는 동시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심을 조명합니다.

탁동경은 처음에는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신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 갑니다. 멸망 역시 단순한 존재가 아닌, 오래도록 외로움 속에 살아온 정체불명의 존재로 묘사되며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둘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 이상의 감정선을 가지며 서로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시청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어느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포스터

 

 

감정 연기와 연출의 조화

 

이 작품이 전달하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박보영은 특유의 따뜻한 눈빛과 서글픈 미소로 탁동경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캐릭터를 담담하고 절제된 연기로 풀어내며, 극 전반에 걸쳐 몰입도를 높입니다.

서인국이 연기한 멸망은 전지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보다 더 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무표정과 차가운 말투로 일관하면서도, 점차 동경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내면을 미세한 변화로 표현합니다. 단순한 악역이나 비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외로움을 겪는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점에서 서인국의 연기는 설득력을 얻습니다.

 

연출 역시 이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끌어냅니다. 인물의 감정선이 크게 흔들리는 장면에서는 배경 음악이나 카메라의 흔들림보다 ‘정적’을 활용하여 극적 긴장감을 더합니다. 조명과 색감 또한 날씨, 계절, 공간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며 감정의 색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섬세한 프레임 구성을 통해 그 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특히 배경음악과 삽입곡은 극의 감정선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피아노 선율이나 감성적인 보컬 곡들이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에 삽입되며, 서사의 밀도를 높입니다.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이 음악은 인물들의 감정과 일체화되며, 장면 하나하나에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스토리 전개는 빠르지 않지만, 그 느린 호흡 속에서 인물들의 변화와 관계의 결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상 가능한 로맨스 공식에서 벗어나 감정의 리듬에 충실한 구성은, 조급하지 않은 시청자라면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죽음으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보이는 삶의 의미를 담아낸 드라마입니다. 멸망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상실, 외로움, 미련, 그리고 사랑을 입체적으로 풀어냅니다. 이 드라마는 멸망과 동경의 사랑이라는 중심축을 따라가지만, 동시에 주변 인물들의 서사도 균형 있게 배치하여 전체적인 서사 구조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차주익(이수혁), 이현규(강태오)와 나지나(신도현)의 관계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동경과 멸망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결을 가집니다. 현실적인 사랑과 상처, 직장 내 인간관계를 통해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로맨스를 구성하며,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게 만듭니다.

드라마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절망과 희망을 교차시킵니다. 죽음이 반드시 끝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멸망’이라는 이름으로 상징화된 죽음은 파괴가 아닌 새로운 이해와 치유로 이어지고, 동경은 그 과정에서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도록 남지 않아도, 단 한 번이라도 진심이 오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철학은 이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건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파국이 아닌, 수용과 이해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사랑과 이별, 만남과 작별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넵니다.

 

기억에 오래 남는 드라마

 

이 작품은 독특한 제목처럼 쉽게 잊히지 않는 감정을 남깁니다.

드라마를 보고 난 뒤에도 여운이 길게 이어지며, 장면 하나하나가 떠오르는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바로 그런 드라마입니다.

죽음을 다루지만 어둡지 않고, 판타지를 다루지만 현실적이며, 사랑을 말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신선하면서도 진중합니다.

삶의 끝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사랑의 온기를 조용히 느끼고 싶다면, 이 드라마는 분명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공감과 치유, 그리고 한 편의 시처럼 담긴 감정이 있는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이 그 자리에 오래 남아줄 것입니다.